기사 메일전송
수레바퀴 아래에서
  • 편집국
  • 등록 2020-12-02 15:58:28
  • 수정 2020-12-06 16:09:35

기사수정
  • 98학번 김상진이 블로그에 쓴 독후감

개인의 문제

이 오래된 마을에 그야말로 저 높은 하늘에서 신비한 불꽃이 내려온 셈이었다.

‘하늘에서 신비한 내려온 신비한 불꽃’이 과연 축복일까. 결과적으로 한스의 재능은 축복이 아닌 불행이었다. 파국의 원인은 한스 개인과 그를 둘러싼 어른들에게 있고, 사회적 분위기와 교육제도 전반에 있다.

 

                             

정말 행복했다. 주 시험에 붙었고, 그것도 2등이라는 사실이 가끔씩 떠올랐다.

예민하고 불안하기만 한 한스가 행복한 순간은 낚시, 수영 같은 일상을 보낼 때와 친구들보다 훨씬 앞서가는 자신을 느낄 때였다. 뒤로 갈수록 일상의 행복까지 공부를 위해 뒷전으로 미룬다. 한스가 이렇게까지 공부에 매달린 이유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에 대한 욕구’다. 아울러 ‘내가 바라는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스는 남들보다 뛰어남만을 쫓았다. 그럴만한 재능과 끈기가 있었다. 하지만 왜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이 정신적, 체력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의 기대에 따라 공부에만 심취했다. 그에게 히브리어는, 수학은 공부와 성적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까.

하일너와의 우정, 엠마와의 짧은 연정이 있었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누리지 못했다. 스스로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쉽게 상처받거나 깨지고 지속되지 않았다. 자기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자존감이 없는 상태로 우정이나 연정으로 채울 자리가 없었다.

 

 


                             

주변인의 욕망

교장부터 기벤라트의 아버지, 선생들과 복습 지도 선생들까지, 스스로의 의무에 전력을 다하는 모든 이들은 청소년들이 인재가 되기를 바라는 자신들의 소원을 가로막는 장애가 한스에게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한스의 꽉 막히고 활기 없는 지금 상태를 억지로라도 몰아내어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믿었다. 동정심이 있는 복습지도 선생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누구도 소년의 갸름한 얼굴의 무기력한 미소 뒤에 물에 가라앉는 영혼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익사의 공포에 휩싸여 절망적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와 몇몇 선생들의 천한 명예욕, 그리고 학교가 이 허약한 학생을 지나치게 몰아댔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 한스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위험한 청소년기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했는가? 왜 한스가 기르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떼어 놓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에서 나온 공허하고 저속한 이상을 불어넣었는가? 왜 시험을 치른 후에 응당 누려야 할 방학조차 즐기지 못하게 했는가? 

주변 사람들 역시 한스가 원하는 삶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로지 공부와 성공에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그것조차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도 신학교 선생님들도 대부분 그랬다. 인간은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고 교감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청소년기 주변인의 영향력은 지배적이다. 한스가 성공을 꿈꾸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하일너와의 우정은 한스가 침잠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부모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오늘 금전적 이익 때문에 자식을 팔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왜 그런 욕망에 사로잡혔을까. 금전적 이익 때문이다. 첫째로 신학교가 무상교육이라 얻는 이익이다. 더 크게는 신학교 졸업 후 얻게 되는 성공을 통한 이익이다. 집안의 위신, 지역의 평판 같은 것도 포함된다. 한스의 공부를 도운 지역의 교장 선생님이나 목사님도 철저히 이익으로 보았다. 하지만 한스는 이익을 투영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고 무한한 가능성이다. 성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다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 많은 가능성을 닫아 둔 욕망이 파국의 직접적 원인이다.

 

 

수레바퀴 아래에서  [ 중앙출판사 ]



                             

획일화된 사회와 교육

너무도 지나치게 내몰리다 길가에 쓰러진 어린 말은 이제 더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신학교 입학과 공부를 위해서만 달리던 한스는 어느 순간부터 주변인의 기대에서 엇나가게 된다. 신경 쇠약으로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기대할 수 있는 것 역시 세 가지다. 개인이 자존감으로 이 상황을 이겨내는 것, 주변인의 관심과 지지로 극복하는 것, 다양한 교육 시스템으로 새로운 길을 가는 것. 한스에게는 세 가지 모두 없었다. 당시 독일 사회는 한스같이 신학교에서 나오게 되고, 김나지움에 갈 형편이 안 되는 학생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그는 교육체계에서 벗어나 공장 견습공이나 시청 보조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이제 더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대안 이전에 독일 사회가 획일화되어 있었다. 우수한 아이들만 선발하여 사회 엘리트로 키워내는 신학교가 그랬다. 신학교는 천재보다는 말 잘 듣는 아이들을 선호했다. 튀면 안 된다. 하일너가 그랬고 한스가 그랬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교육풍토는 히틀러의 출현과 전체주의 사회와 연결된다.

 

                             

“아, 그만합시다. 당신이나 나나 어쩌면 아이에게 몇 가지 소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스의 장례식에서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는 한스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물론 아버지는 불편해할 뿐 대답하지 않는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플라이크는 같은 질문은 우리에게 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어떠냐고 묻는다. 아이들에게 소홀한 것이 있지 않냐고.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사이 세월호로 아이들을 잃었고, 많은 아이들이 공교육 체계에서 낙오자로 전락 중이다. 우리 시대는 무한 경쟁 시대가 되었고 한스 같은 청소년이 아니라 다 큰 어른들도 실패를 맛보기 일쑤다. 내가 돕고 있는 영구임대 아파트 주민들은 잘못 디딘 한두 걸음 때문에 힘겨운 삶의 조건으로 내려앉았다. 가족 중 아픈 사람 한 명의 의료비 때문에 수급자가 된 가정도 심심치 않게 많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주변인으로서 역할도 생각해본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특별히 아빠로서 나는 어떤 욕망을 가졌는가. 이 질문을 묵직하게 느끼며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고자 한다.

TAG
1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rabbit22021-01-26 12:04:01

    생각할꺼리가  많은  글입니다!
    아이를  어떤  존재로 보는지 어른들  자신과 사회가 성찰이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한편, 성찰할 수 있는  여유와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이닌지..
    서로  함께 일구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모두를  위해 화이팅!을  외쳐봅니다.

경북대학교 사회복지학부
facebook
사회복지학부 재학생 유투브 채널
인스타그램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