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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중 몽고반점
  • 편집국
  • 등록 2020-12-15 08:20:33
  • 수정 2020-12-15 2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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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학번 신승현 학우가 '상상과 정신분석' 시간에 과제로 제출한 글


[채식주의자-몽고반점]

 

<채식주의자>의 중심인물인 영혜는 어느 날 꾼 꿈으로 채식을 하게 되었고 주변 모두가 걱정할 정도로 여위고 이상한 상태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3개의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3개의 에피소드 모두 프로이트의 성충동 이론으로 분석할 수 있는 요소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 글에선 <몽고반점>을 다뤄보려 한다. <몽고반점>에선 다른 에피소드와 다르게 성충동의 예술적 승화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승화가 실패하여 성충동의 폭주로 종결하기에 이 에피소드는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분석해 볼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에피소드에선 어떤 과정으로 성충동의 승화가 실패하게 된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두 번째 에피소드인 <몽고반점>에선 영혜의 형부가 화자가 되어 시작한다. 영혜의 형부는 영상예술을 하는 사람이다. 그에겐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이미지에 대한 갈등이 남아있었다. 남녀의 성관계를 꽃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마치 암술과 수술이 결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는 갈증은 있었지만 그렇게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선에 있었다. 어쩌면 외설이 아닌, 예술로 승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여태까지 자신의 작품과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별명은 ‘오월의 신부’로 의식 있는 신부, 강직한 성직자 이미지를 가진 작가였다. 그런 그에게 이런 작품은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가정이 있는 한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지켜야 할 규범이 있었다. 이처럼 그는 규범과 시선에 성충동을 억압당하며 예술로 승화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그랬던 그에게 충격적인 사실이 다가온다. 처제인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나 남을 법한 몽고반점. 그렇기에 더욱더 생명감이 넘치는, 일종의 발아점으로 보이는 것. 그의 스케치에 나오는 여성은 이제 영혜가 되었다. 더군다나 ‘채식’하는 모습은 하나의 ‘꽃’처럼 보였으리라. 그는 억압해오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역겨운 상상에 직면하여 고뇌한다. 

 

“그의 스케치 속의 여자는 얼굴이 잘려있을 뿐 처제였다. (중략) 그렇자면, 여자의 목을 조르듯 껴안고 좌위로 삽입하고 있는 얼굴 없는 남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중략)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의 선택으로 인한 발걸음 한번에 그가 이뤄온-대단찮은 것이었으나-모든 것을, 가정마저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p.75)”

 

제아무리 예술 작품이라 보려 해도 대상은 ‘처제’였다. 그리고 상대를 자신으로 생각했다는 건 더욱이 용납받을 수 없는, 근친상간이었다. 그렇지만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너무나 컸기에 그는 영혜에게 허락을 구한다. 영혜는 몸에 꽃을 그리는 걸 허락했고 이때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비밀로 해주길 부탁한다. 허락 맡았다지만 그래도 ‘처제’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 대신 후배인 J를 통해 그 장면을 찍으려고 한다. 자신 대신 J를 택한 이유는 자신의 모습이 늙었고 추해서 생명감 넘치는 영혜의 모습과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충동을 억압하기 위해서였기도 할 것이다.

 

J가 처음 본 영혜의 모습을 찍은 영상은 예술이었고 그는 작품에 감탄한다. 하지만 나중에 본인이 영혜와 성관계까지 하게 되자, 그에겐 예술이 아닌 포르노가 되었다. 그렇게 J는 촬영을 포기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J는 영혜가 선배의 처제인 사실을 모른 상태였음에도 포기했다는 것이다. 아마 J가 영혜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그는 선배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이 들면서 영혜가 나온 영상을 채보기도 전에 자리를 뛰쳐나갔을 것이다. 이처럼 영혜의 진실을 몰랐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그가 포기한 것을 보면 이는 예술이 아닌 외설이었다.

 

작품의 실패는 형부의 성충동 제어 실패로 이어진다. 작품을 완성하려는 욕구와 그에서 비롯된 근친상간. 이제 그는 자신도 하나의 꽃이 되어 스스로 작품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끝은 아내에게 난교 흔적을 들키면서 정신병원으로 수송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초반에서 그의 작품은 어쩌면 예술로 볼 여지가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혜의 ‘몽고반점’은 여지마저 앗아갔다. 그리고 ‘J’의 행동은 애초에 여지조차도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욕구를 승화하고자 했던 마음은 애초에 억압의 대상이었다. 여기에 근친상간 욕구까지 더해지면서 승화와 억압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폭주한 성충동은 결국 그를 앗아간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

 

이 작품을 처음 볼 때 프로이트 이론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받았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 이상이었던 거 같다. 성충동 이론은 우리가 무의식으로 감춰두고 있던 사실을 들킨 거 같은 느낌이었다면, <채식주의자>는 이 이론이 가감 없이 표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문학적 표현으로 드러난 성충동에 역겨움을 자아내곤 했다.



 

특히나 이 에피소드의 형부가 영혜와 성관계를 하는 장면에선 성충동의 특성이 드러난다. 아마 그는 이 성관계가 처음 자신이 의도했던 식물 간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윽고 그는 자신의 성충동이 어떤 것인지를 직시하게 된다. 그는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았다. 어쩌면 모순처럼 보이는 이 부분이 성충동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암술과 수술의 결합처럼 자연 속에서의 당연하고 생명감이 들기도 하는 면은 성충동이 우리에게 내재된 자연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는 것은 제어되지 않은 채 성충동을 방출하는 것이 가지는 야성을 보여준다.

 

이토록 성충동과 승화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볼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역겨운 표현을 써내려갈 수 있는지 작가의 역량에 감탄할 뿐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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