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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손혁준의 독일생활 1
  • 편집국
  • 등록 2021-11-20 09:09:03
  • 수정 2021-11-29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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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오게 된 이유 & 지난 10년간의 삶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복지학과 졸업한 손혁준이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독일에 살고 있으며, 여기서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독일 영주권을 준비하고 있으며, 평생 독일에서 눌러 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하다가 우선 제가 독일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꼭 한명씩 반에서 있을 법한, ‘열심히 공부는 하는데 성적은 나오지 않는 학생’ 중 한 명이였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고 수업시간에도 졸아본 적이 없음에도 늘 저의 성적은 중간 수준밖에 되지 못했고, 남들이 한 번에 이해한 것을 두 번 세 번 들어야 이해를 하며, 남들이 한 시간 해서 외울 것을 두 세 시간 걸려도 잘 외우지 못하는 그런 학생이였습니다.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늘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우울증, 불면증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중간고사를 너무 심하게 망치고 난 후, 집에서 혼자 우울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이 영화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내용은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 틴에이저 영화였는데, 저는 그걸 보면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쟤네들은 나랑 같은 나이 때에 저렇게 재밌게 사는데 난 왜이리 우울할까?, 쟤들은 고등학교 때 운동도 하고 친구 집에서 놀기도 하는데 왜 난 맨날 학교랑 학원 집 밖에 다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기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때 인터넷에서 해외 유학에 관련된 자료도 많이 찾아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해외 유학은 제겐 너무 사치였으며, 얼마 뒤 고3 수험 생활을 시작하자 그 생각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수능을 쳤지만 제가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또 1년을 보내고 재수를 해서 경북대에 정말 간신히 오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겐 경북대가 수능을 망해서 온 대학일수 있으나, 저는 4년간 행복한 추억이 하나도 없이 오로지 수험서에만 파묻힌 생활을 해서 얻은 결과물이였기에 너무나도 소중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원하는 것을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 중 가장 원하는 소원이였던 외국가기를 이루기 위해 전화영어를 통해 영어 스피킹을 배웠고,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에 제가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번 돈과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할리우드 틴에이저의 삶은 실제 미국 고등학생들의 생활과는 다르겠지라고 생각을 했으나, 약간의 과장이 있었을 뿐 정말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영화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 드라마 ‘상속자들’이나 ‘꽃보다 남자’의 생활은 한국과 다르지만요) 그 친구들은 학교에 가서 수업을 선택해서 들으며 체육활동이나 음악활동들이 중요해 영어나 과학과 같은 학문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학교가 끝나고 난 뒤 친구집에가서 하우스 파티를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와 같이 매일 어학원이 끝나고 놀던 유럽 친구들과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면, 저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바이올린 연주를 했어” “나는 하우스 파티에 가서 대만 여자친구를 만들었어” “나는 강아지 동호회에 가입을 했었는데, 거기 사람들이 너무 별로라서 몇 달 활동하다가 그만뒀어” 이런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데, 저에게는 고등학교의 추억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늘 8시에 등교를 해 야자 끝나고 10시 11시에 집에 가서 바로 자고 다음 날 또 학교를 가고, 주말에는 보충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고, 일요일은 학원을 가는 그런 삶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 매번 수능등급 이야기를 하고 무슨 대학교는 내신을 몇프로 반영하고 그런 것에 내 10대를 다 보내는 것이 맞을까 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고 군대를 가고 제대를 한 이후 저는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외국 활동들을 다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한미군 가족과 함께하는 KAFC, KLT 프로그램, 경북대 교환학생 도와주는 BUDDY 프로그램, 교양 원어 수업 등등 온갖 할 수 있는 활동들을 다 했으며, 4학년 1학기에는 리투아니아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이 시점부터였고,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인턴을 지원하고 합격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불운했던 것이, 제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었을 때 코로나가 터졌고,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한국인을 입국금지시킨 상황이였습니다. 저는 간신히 미국인턴비자를 받았고, 미국으로 출국을 했으며, 제가 비자를 받은 3일 뒤 주한미국대사관은 비자발급을 전면중지 시켰을 정도로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양인 혐오 분위기속에서 꿋꿋히 버티며 일했고, 1년간 버티자 회사에서는 정식 취업비자 발급을 지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h1b 취업비자는 오로지 30%의 확률로 제비뽑기로 당첨이 되며, 그 마저도 저는 이공계열 석박사가 아닌 한국문과학사 출신이라 떨어질 확률이 극히 높았습니다. 결국 저는 떨어지게 되었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오니 대부분의 사회복지학과 동기들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사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저는 28살의 나이에 한국에서 백수신분으로 있는 것이 힘들었고, 나도 따라서 공무원을 해야하나하고 진로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3~4학년 때 다들 취업준비를 할 시기에 저만 외국 나가서 신나게 놀고 있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였을지 모릅니다. 


 저에게 정말 마지막 희망이 찾아온까요? 코로나로 인해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대거 귀국을 해, 지금 제가 일하는 회사는 인력난에 빠진 상태였고, 저는 우연히 독일에 거주하시는 분의 유튜브를 보고 독일에 있는 한국회사들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는 미국에서 일하던 같은 한국회사의 독일지점이였음으로 쉽게 채용이 되었습니다. 저는 회사 덕분에 취업비자를 손쉽게 발급 받았으며, 결국 독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미국과는 달리 독일은 늘 이민자의 문을 열어두고 있으며 영주권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기에 영주권을 위해, 또한 미래에 더 좋은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매일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가끔 제 친구들이나 주위 분들이 ‘너는 참 대단하다, 어떻게 미국도 가고 독일도 가서 일할 생각을 다하냐’ 하시지만, 솔직히 저는 여러분들이 훨씬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며 공부하며, 가족을 위해 생계를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하며, 굳건히 버티며 살아가는데 저는 정말 제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국을 떠났기에 여러분들이 훨씬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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