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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시간
  • 편집국
  • 등록 2022-07-19 10: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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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영 작가

<어른의 시간>


***오늘의 나

  아동그룹홈에서 보육사로 일하고 있다. 아동그룹홈은 원가족과 함께 살기 어려운 몇몇의 아이들이 혈연관계가 아닌 가정을 이루며 함께 사는 집이다. 지역사회 안의 아파트나 빌라, 단독주택에서 아이들에게 가정과 유사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이곳의 목적이다. 통상 서너 명의 사회복지사가 24시간, 365일 돌아가며 일곱 명 이내의 아이들과 그룹홈에서 함께 잠을 자고 밥을 해 먹는다. 나는 그 중의 한 명이다.

  토요일인 어제, 아침 열 시에 출근해서 일요일인 오늘,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서 퇴근했다. 지하철을 타고 남편과 두 딸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마다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입던 옷을 벗어서 세탁기에 돌리고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 그러고 노트북이 놓인 책상 앞에 앉으니 오후 네 시 반이 되었다. 내일 하루를 집에서 쉬고 나서 화요일 아침 열 시가 되면, 그룹홈 아이들이 기다리는 또 다른 집으로 나는 돌아갈 것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신 뒤에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교대하는 동료와 함께 어제 하루는 무탈했는지, 아이들이 학교는 잘 갔는지, 며칠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또 시작할 것이다.

  일요일인 오늘 아침은 그룹홈 아이들과 함께 느지막이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첫째가 일어나 나를 보자마자 “이모, 마라탕이 먹고 싶어요.”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생각해둔 메뉴는 따로 있었지만, 이번 시험을 특히 잘 봤다고 자랑하는 녀석이 기특해서 어떻게든 축하를 해주고 싶었다. 냉장고와 부엌 선반을 뒤져서 대패삼겹살과 오징어, 콩나물, 중국당면을 넣은 마라탕을 끓여내었다. 중학교를 다니는 둘째가 마라탕은 먹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셋째는 마라탕이 생각보다 맛있다고, 조금 더 끓여달라고 요청했다. 

  어찌어찌 식탁을 치우고 나니 아홉시가 좀 넘었다. 날이 선선할 때 숙제를 마치라고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힌 후에,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금세 또 점심준비 할 때를 맞았다. 닭다리살 정육에 당근과 양파, 당면을 넣고 닭볶음탕을 끓였다. 한참 자라는 사내아이들이라 먹는 것에 어찌나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그날 반찬이 입맛에 맞는 정도에 따라 나머지 반나절 표정이 결정되었다. 입맛도 심사도 제각각인 아이들을 제대로 헤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이가 밥을 먹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흥이 올라 전에 없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눈을 맞추고 웃음을 짓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희열에 비견할만한 것도 없어서, 나는 또 아이들의 마음을 훑고 또 훑게 되었다. 


***매만지는 시간

 그룹홈에서 일한 지는 2년 3개월 정도가 되었다. 밤잠 설쳐가며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10년도 훨씬 넘는 사회복지 커리어를 가지고도 나이 마흔여섯에 명함 한 장도 없는 아동그룹홈 보육사가 되었다. 사회복지시설종사자 인건비가이드라인에도 못 미치는 처우를 받는, 그야말로 현장에서도 홀대를 받는 직종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기간, 개인적으로 상당히 고되었지만 이력서에는 기록할 수 없었던 7년간의 경력단절과 이후 노동시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내게 이 이상 좋은 일자리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에게 확신을 주는 한 가지는, 여기서 일하는 것이 좋다는 내 감정이다. 그냥 그룹홈에서 아이들이랑 지내는 것이 좋다. 그룹홈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다보면,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내 안의 상처들을 다시 쳐다보고 매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이들의 '불쌍함'이 아니라, 내 안의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 남들과 다른 성장환경을 의식하다가 어색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자신의 결핍을 메우고 싶어서 뭔가를 과잉하며 노력한다거나, 행복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혼자만의 공상을 일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웬만하면 다시 기억하거나 꺼내지 않고 없는 듯이 잊어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을 일일이 꺼내서 볕에 내놓는 의식을 치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 말이다.  

  과하게 애쓴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동료 하나는 힘이 들지 않느냐고 대놓고 물었다. 다친 곳을 후벼 파는 듯이 아프고 불쾌했다. 그렇지만 오래오래 천천히 그 말들을 곱씹었다. 그러고 나면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싶어서였다. 부모의 받아들여지지 못함은 나의 것이 되었다. 부모님은 나를 아낌없이 사랑했지만 끝끝내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했던 행동 양식은 고스란히 나에게 학습되었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는 확신을 받지 못한 것 같다. 내 존재 자체보다는, 존중받지 못하는 부모, 그리고 그들의 자녀라는 위치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공기를 마시며 자랐다. 장애에 대한 혐오였다. 눈빛이나 몇 마디 말로 스쳐지나갈 줄 알았던 사람들의 사소한 제스처들이 쌓여서 엄마 아빠의 삶을 넘어 내 삶에까지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집안 누구의 결혼식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곳에 참석했던 친척 어른 한 분이 일부러 남편을 찾아와 인사를 하다가 어깨를 두드리며 혀를 찼다. 몸이 불편한 부모 밑에서 보고 배운 것 없이 자랐더라도 자네가 은혜를 이쁘게 좀 봐주게 했던가? 그래도 애는 착하다고 했던가? 부디 잘해주게, 하고 인자하게 웃으며 마무리했던가? 그게 나를 바라보는 주변 어른들의 시선, 내가 느끼는 세상의 시선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의식하는 습관이 생겨났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이겨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른의 시간

  그러고 보면 20대와 30대 내내 골몰했던 것은 ‘도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의 내가 이 문장을 읽었더라면 본인 인생의 상당 시간을 ‘이겨냄’이 아니라, ‘도망’이라는 키워드로 표현한 것을 두고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이른 결혼, 하루에 한 시간씩 잠을 자며 이어갔던 대학원 생활, 영혼을 갈아 넣은 육아, 그리고 우수 사례를 휩쓸고 다녔던 직장 생활. 어디에나 가난 혹은 결핍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겨낸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이나 결핍이라는 흔적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모양을 하고 끊임없이 영향력을 미치고는 했다. 이를테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우울감이나 자괴감, 불안, 열등감 같이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과 함께 말이다.

  그룹홈에서 보육사로 일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림자 하나 없이 이 모든 것을 말갛게 이겨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간의 나는 이겨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감탄할만한 무언가를 보란 듯이 성취한 삶을 쫒아갈 때마다 내 목마름이 극심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사라지지 않는 것과 싸워서 이겨보겠다고 하던 청년시절의 나를 후회하거나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중년은 어른이라는 이미지와 맞닿는다. 나에게 어른은 어린 누군가를, 약한 누군가를 비로소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마흔 여섯의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유년기의 나와 청년기의 내가 매순간 넘어서고 싶고, 도려내고 싶어 했던 흉터들을 드러내고 매만지는 어른의 시간을 동경하게 되었다. 해결되지 않는 내 안의 문제들을 어른이 된 내가 다시 응시하고 조심조심 쓰다듬는 시간 말이다. 남이 보는 시선을 따라가는 것을 멈추고,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내 눈으로 보았을 때 보이는 세상을 내가 가진 언어로 하나씩 하나씩 새로 감각해나가는 시간 말이다. 남이 말했을 때 좋은 시간, 남이 말했을 때 좋은 조건이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좋은 시간, 내가 느끼기에 좋은 조건을 찾아가는 시간 말이다. 그림자까지도 끌어안는 시간이라고 해야 적절하겠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특별함이 남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삶이 힘겹고 부끄러운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소원까지도 품어본다. 어느 순간, 그룹홈 아이 중 어느 녀석이고 눈물을 흘리며 다급히 어른을 찾을 때, 지금의 너는 그럴 수 있다고, 나도 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이모이고 싶다.

사진 : 군위 사유원, 기도의 방(성희자 동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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