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BOOK] 세상물정의 사회학
  • 이연주 책임기자
  • 등록 2023-01-31 01:18:24
  • 수정 2023-01-31 01:18:44

기사수정



책을 보기 전 항상 머리말을 본다.

그래야 글쓴이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머리말을 읽으면서 나즈막하지만 일침이 되는 글을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절대 나즈막하지 않았다. 시원시원한 문체와 엄청난 필력의 돌Ⅰ사회학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노명우 교수는,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만약 사회학이 어떤 한 개인의 삶도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그 연구대상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면, 사회학은 학자라는 전문가 집단의 호사스러운 말잔치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부과할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본래 학자는 사유의 대리인이다. 직접적으로 사회에 유용한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자의 존재가 무익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이유는 사유의 기능이 학자라는 전문집단에게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대리인으로 위임장을 받았기에, 학자의 전문성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조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보편적 삶에 대한 성찰를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기 위해 연구실을 나온 사회학자가 되었다.


삶의 현장, 여기서는 세속이라 표현하는 곳에서의 리얼리티를 그 속에서 부딪히는 용어로 풀어아가면서 독특했던 것은 각 주제마다 사유의 흐름을 따라 도서를 제시하고 있다. 짤막한 제목에 키워드와 함께 도서도 함께 제안하고 있어서 더많은 책을 같이 접한 듯하다. 그리고 순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 관심있는 키워드부터 읽었다.


[상식]에서는 상당히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파는 거짓을 말하지만 인간에게 말하고 있고, 좌파는 진실을 말하지만 사물에게 말하고 있다는 말은 어딘가 모순투성이고 회색론자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나는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진실을"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프랜차이즈]에서는 표준화와 효율성을 섬기는 합리화라는 현대의 프랜차이즈(맥도날드)라는 종교를 이야기하고 있다. 대학, 병원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잠식해 가며 결국은 자본의 축적과 유동만을 읽어낼 수 있는 합리성의 추구는 비합리성을 연출하고 결국은 비인간화를 도모하게 되는 현실을 꼭 집어 놓았다. 작은 합리적 선택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비합리성 속에서, 자본의 지배가 확대되면 우리는 자본의 울타리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쇠 감옥'에 갇힌 꼴이 된다...라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쇠 감옥' 속에 이미 있는 것이 아닐까.

 

[종교]에서는 구구절절이 옳았다. 저자는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 땅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 자신의 편의에 따라 죄를 지으면서 안식을 바라는 얄팍한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이자 이미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돈이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그래서 더 정확한 구별점을 제시하는 것 같다. 적어도 신앙을 하는 이들은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저자가 말한 종교. 일명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세상에 흩뿌려져 있는 많은 종교는 당연히 이러하다. 이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크리스찬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다시 정돈하는 시간이 되었다.


[자살]에서는 '사회적 자살'에 대해 급공감하면서, 이 말을 인용하게 된다. "학자는 자살률을 설명하지만, 자살률을 낮출 수 있는 방법 찾기는 국가와 정책입안자의 몫이다. 만약 이들이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살방조죄로 기소되어야 하며, 또한 그들을 기소하지 않은 사회는 범인은닉죄로 고발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자살'을 설명하느라 지친 사회학자가 버스 안에서 깜빡 잠에 빠져 꾼 꿈처럼...

나는! 매일 천국을 꿈꾼다!


[노동] 임금노동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정지한다. 그렇다고 퇴근하는 순간 삶을 다시 찾을 수는 있는가. 그 기대는 곧 더 이상 희망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가슴 한 쪽에 사직서를 품고 사는 임금노동자들은 또 한 쪽 가슴팍에는 복권(로또)를 담고 매일 백일몽을 꾼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날 때가 아닌가하고 저자는 복권이 아니라 연대라는 선택을 제안하고 있다.

나는 오늘 '연대'를 선택했다. 이것을 마르크스가 말하는 해방... 뭐 그런 것이 아니다. 말그대로 "연대"를 선택했다. 살아있는 인간과 인간의 연대!를... 숨쉬는 조직과 조직의 연대를...


[게으름] 저자는 여기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을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허락된 게으름', '사유의 권리', 또 다른 의미로 '자유'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임금노동선전에 뛰어든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하지만, 정말일까? 그리고, 그렇게 살다 과로사로 죽으면...... 참, 답이 없는 물음같지만, 함께 고민하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안에서 답을 찾고 있다.


[성숙].. 성장과 성숙이 많이 다름을 보게 된다.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성숙을 넘어 이제 [죽음]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모두 죽음이 누구에게나 불가피함을 알고 있다. 누구도 피하갈 수 없는 죽음이기에 그것을 피하거나 되도 않은 돈지랄로 생명을 연장하기보다 진짜 무엇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지 이야기한다. 그렇게 나이듦과 원숙함이 결합된 사람이 되어감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항상 젋을 수는 없다. 영원히 살 수도 없다. 나이 듦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우 짧은 시간만 젊음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인생에선 젊지 않은 시절이 더 길다. 그렇기에 젊음의 사멸을 유예하려는 애달픈 시도보다 원숙한 노년에 대한 준비가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중략)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지혜가 먼저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삶의 리얼리티와 용감하게 대면하며 좋은 삶을 위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원숙한 노인의 얼굴은 인생의 동지에서도 달빛 아래 오리혀 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라고...


여기서, 참으로 아쉬웠다. 저자는 죽음이후를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말 눈 앞에 보이는 세속의 리얼리티에만 충실하구나.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답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책을 손에서 놓았다.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이야기하고, 월급쟁이 사회학과 교수로 삶의 평범성을 고민하며 세상물정의 비밀과 거짓말 속으로 뛰어든 탐정 사회학자의 모험은 화려하고 음울한 세속의 파노라마 속에서 냉혹한 리얼리티와 마주하며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다만, 저자에게 다음에는 자신의 근본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하는 의지가 더 있기를 기도해 본다. 사도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와 같이 되기"를 소망한다.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경북대학교 사회복지학부
facebook
사회복지학부 재학생 유투브 채널
인스타그램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