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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가슴
  • 편집국
  • 등록 2023-02-10 11:35:01
  • 수정 2023-02-10 11: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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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기 전 가방 싸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편이다. 핸드폰 일정관리 앱을 살펴보고 나서 알맞은 옷을 고르는 일이 시작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대개는 나일론 티셔츠, 고무줄 바지, 속옷과 양말을 한 벌씩 챙긴다. 오늘 출근하고 나면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백팩 지퍼를 열어서 가방 바닥 맨 아래에 벗어낸 옷을 담는 비닐백을 반듯하게 펼쳐 놓는다. 그 비닐백 위에 옷장에서 집어온 속옷과 겉옷, 그리고 핸드폰 충전기, 화장품 파우치를 차곡차곡 집어넣은 뒤 다이어리나 필통 같은 것들을 더 얹는 식이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씩 앉아있어야 하는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넣었다 뺐다 하며 고심한 뒤에 지퍼를 닫는다.

나는 아동그룹홈에서 일한다. 그룹홈은 원가족과 함께 살기 어려운 아이들이 생활하는 사회복지시설이다. 가정과 유사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지역사회 안의 주택이나 빌라, 아파트 등에 간판도 없이 살림을 꾸리고 사회복지사 서너 명이 일곱 명 안쪽의 아이들과 함께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돌아가며 함께 잠자고 밥을 지어 먹으며 생활한다. 밤이건 주말이건 명절이건 예외는 없다. 그럴 때일수록 아이들만 두고 집을 비우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룹홈에 따라 아이들이 사회복지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그중 한 명이다. 

“나는 왜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룹홈 막내가 나에게 질문을 한 것인지, 혼잣말을 한 것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런 식의 이야기로 어수선한 마음을 내비치는 날이면,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패악을 벌이곤 했던 터라, 조금이라도 빨리 막내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안에서 차오르는 공기를 안전하게 빼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오늘 엄마가 보고 싶었구나. 이리 와, 이모랑 꼭 끌어안자.” 

나일론 티셔츠에 고무줄 바지는 바로 이때 위력을 발휘한다. 옷이 구겨지거나 뜯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없이 아이에게만 집중해서 움직일 수가 있다. 잔뜩 골이 나서 몸을 옹크리고 있거나, 망아지처럼 신이 나서 덤비거나, 바닥에 껌처럼 누워있거나 간에, 크크큭 하고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꼬옥 끌어안기부터 간지럼 태우기, 그리고 발로 아이를 들어올려 비행기 태우기까지 전천후다. 아이와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사이 가스렌지 위에 얹어둔 콩나물국이 넘치더라도 얼른 팔을 풀고 달려가 뚜껑을 열고 행주질을 하고, 가스렌지 불 앞인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장난을 치자고 덤비는 녀석을 몸으로 막으며 진정할 때까지 다시 꼬옥 끌어안아 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무릎 위에 눕혀놓고 면봉으로 귀지를 파주거나 마룻바닥에 앉혀놓고 손톱을 깎아줄 수도 있다. 

국가통계포털 KOSIS의 「보호대상아동 현황보고」를 참고하자면, 부모가 죽거나 이혼하거나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겪거나, 학대를 하는 등의 이유로 더 이상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아이가 2021년 한 해에만 3,437명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는 2021년 출생아 수의 1.3%에 달하는 수다. 발생 이유로는 학대가 1,660건으로 가장 많고 혼외자, 이혼, 비행․부랑 등이 그 뒤를 따른다. 이 아이들 중에 2,183명이 아동양육시설이나 보호치료시설, 그룹홈 같은 사회복지시설에 입소했다. 나머지는 모두 가정위탁이나 입양이 되었다. 보건복지부 그룹홈 현황 자료(2021년 12월말 기준)를 보면 전국 3,105명의 아이들이 617개의 그룹홈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말할 때마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자꾸만 더 커져서 곤란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그룹홈 이야기가 그렇다. 아이들이 식탁에 모여 앉아 사그락 사그락 소리를 내며 과자를 씹어먹고, 햇살을 받으며 비스듬히 누워서 핸드폰 게임을 하는 이 집을 두고 ‘사회복지시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던가, “나는 왜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거야.”하는 막내의 말을 글자로 옮겨쓸 때 말이다. 

사회복지시설에서 산다던가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산다는, 그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존재하던 아이들이 납작하게 붙박혀버리는 것 같은 떨떠름함을 떨칠 수가 없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표현을 쓰는 순간, 얼굴에서 어떤 긴장 같은 것을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마치 각양각처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던 사람들이 암이 있다고 말하고 나서 그 어떤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암환자'로만 존재하게 되는 상황처럼 말이다. 

말하면 말할 수록 말해질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자꾸만 커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더 이상 어떻게 말로 풀어 내야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른다. 비웃음을 당하거나 공격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매번 입을 닫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해치고 말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얼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하는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 다름과 차이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다름과 차이가 마치 위계가 되어 우리의 삶을 위축시키고 배제시키는 모습에 대해서 자꾸만 자꾸만 이야기해보고 싶다. 언젠가 이 말들이 쌓여서 우리를 묶고 있던 경계들을 조금씩이라도 허물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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