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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밝은 밤
  • 김상진 기자
  • 등록 2023-02-14 16:3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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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영옥이는 씩씩하고 밥도 잘 먹고, 크게 웃고 공도 잘 차고 달리기도 잘하지. 희자랑도 친하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아재빈 키가 크구 목도 길구, 항상 웃구 밥도 잘 자시구.

-듣기 좋구나.

-끝이 아니라요. 아재비랑 있으면 우리 어마이랑 아바이랑 모두 웃구, 새비 아즈마이두 웃구, 회자도 웃구. 아재비가 오기 전이랑 달라요. 아재비는 해 같은 사람이라요. 낭중에두 해를 보믄 아재비가 생각날 것 같아요.

-말하는 거 보라우. 영옥이는 낭중에 시인을 해야갔어.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동안 할머니는 학교에서 겪었던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안심이 됐다. 증조부는 할머니가 크게 웃거나 공을 차면 화를 냈지만 새비 아저씨는 그걸 좋게 봐주었다. 새비 아저씨는 일하는 식료품점에서 종종 주전부리를 가져와서 몰래 먹으라고 주기도 했고 할머니가 우스운 얘기를 하면 재미있다고, 더 해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 새비 아저씨 곁에 있는 새비 아주머니의 얼굴에도 어느새 살이 오르고 웃음이 어렸다

P. 111-112


새비 아저씨는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어른 중 유일하게 괜찮은 사람입니다. 지금 봐도 괜찮은데 그 시대로 보정하면 정말 정말 괜찮은 어른이지요. 새비 아저씨를 거울 삼아 어른으로서 나를 비춰보게 됩니다.



그런 생각은 증조모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좋다,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같은 표현을 하면 증조모는 부정 탄다고 경고했다. 자식이 예쁠수록 못났다고 말하고, 행복할수록 행복하다는 말을 삼가야 악귀가 질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P. 199-200


이십 대 초반까지 저도 딱 저런 정서가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크게 웃지 않고 마땅히 누려도 되는 것도 가벼이 넘겨 버렸어요. 대신 별일 아닌 것에도 크게 아파하고 대수롭지 않은 문제도 심각하게 여겼죠. 안좋은 일에는 '내가 그렇지 뭐.' 하던 시간들이었어요. 그때 다가와주고 "괜찮아.", "괜찮다." 해준 사람들이 있어 달라질 수 있었어요. 그런 사람 얼굴 몇몇이 바로바로 떠오르니 참 괜찮은 인생이지요?



-새비야.

-응.

-내레 아까워.

-뭐가.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았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난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 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P. 258


좋은 시간이 가는 게 아깝다는 증조모의 말도 "기냥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하는 새비 아주머니의 말도 모두 이해가 됩니다. 그치만 언젠가부턴 좋은 건 그냥 좋은 순간 그대로 누리는 자족의 삶 그게 더 좋아 보여요.


[출처] [밝은 밤]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작성자 빈손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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