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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세가지 인간 유형
  • 성희자 편집부
  • 등록 2023-04-16 10:57:07
  • 수정 2023-04-17 08: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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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철학자 이야기는 다소 따분하게 느껴진다. 나도 그랬다.

우선 이해하기 어렵고,

진부하다고 생각들어 거부감 마저 들었던 철학이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다보면 문제해결중심의 실용학문이다 보니,

이론이나 방법의 근거가 되는 철학을 이해하지 못할 때 충분히 가 닿지 않는 듯한 아쉬움이 늘 있었다.

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여전히 어렵다.


최근 이해한 인간의 정신 세 가지 유형, 혹은 인간의 세 유형에 대한 니체의 생각들을 함께 공유하면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사람의 정신, 인간의 정신유형을 살펴봄으로써 나의 정신유형, 타인의 정신유형을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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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1844-1889)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세가지 유형을 말했다.


전문


[세단계의 변화에 대하여]

 

나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 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참고 견뎌내야 할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거운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너희 영웅들이여, 내가 그것을 등에 짐으로써 나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그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저 더없이 무거운 것, 그것은 무엇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묻는다. 

그것은 자신의 오만함에 상처를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이 아닌가? 자신의 지혜를 비웃어줄 생각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

아니면 우리가 도모한 일이 크게 잘 되었을 때 그 일에서 손을 떼는 일인가? 유혹하는 자를 유혹하기 위해 높은 산에 오르는 일인가? 

아니면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로 살아가며,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뎌내는 일인가?

아니면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문병 오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벗하는 일인가?

아니면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고 차디찬 개구리와 뜨거운 두꺼비조차 물리치지 않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위협할 때 오히려 그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일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낙타는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잔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여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비늘 짐승이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정신이 가는 길을 금빛도 찬란하게 가로막는다. 그 비늘 하나하나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이 금빛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들 비늘에는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치들이 번쩍인다. 그리고 용 가운데서 가장 힘이 센 그 용은 "모든 사물의 가치는 내게서 빛난다"고 거들먹거린다.

"가치는 이미 모두 창조되었다. 창조된 일체의 가치, 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나는 하고자 한다'는 요구는 더 이상 용납될 수가 없다". 용이 하는 말이다.

형제들이여, 무엇 때문에 정신은 사자가 되어야 하는가? 짐을 질 수 있는 짐승, 체념하는 마음 그리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짐승이 되는 것만으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적어도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경건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의 정립을 위한 권리 쟁취, 그것은 짐깨나 지는 그리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정신에게는 더없이 대단한 소득이다. 참으로, 그에게 있어 그것은 일종의 약탈이며 약탈하는 짐승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신도 한때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더없이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신성한 것에서조차 미망과 자의를 찾아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서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 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으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나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노라,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 가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 때 그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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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신의 명령, 선조로 부터 내려온 가치, 의무, 관습들에 복종하는 인간의 정신이며, 

사자는 "나는 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가진 인간의 정신. 무조건적인 순종에 저항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정신이다.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놀이를 함으로써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놀이를 통한 창조가 인간이 가진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대할 때 자유로운 인간으로 보기 보다는 낙타적 인간, 사자적 인간을 강요해 오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실천의 목적 중에 '사회적 기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기존의 가치나 관습, 규범을 전제로 적응 혹은 순응시키는 점이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 시행하는 사회복지적 개입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규범에 맞추려고 하는 내용들은 수정되어 가야 할 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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