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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이 있는가
  • 편집국
  • 등록 2023-12-27 08:31:54
  • 수정 2023-12-27 08: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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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이 있는가

 

"그렇게 중국인들은 변법자강운동의 좌절을 통해 정치나 제도 너머에 있을 더 근원적인 힘을 찾아 나선다. 그렇다면 ‘더욱 큰 힘’은 무엇이겠는가? 중국인들은 그것을 문화, 윤리, 사상, 철학으로 보았다. "


『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55쪽


철학(생각)을 수입하는 나라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생각이나 사유의 결과들을 수입해서 살았던 습관을 이겨내고, 스스로 사유의 생산자가 되는 길을 열어야 한다. 사유의 결과를 배우는 단계를 넘어서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으로만 자기 삶을 채우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파하고, 대신해주는 삶밖에 살 수 없다. 이는 종속적인 삶이다. (…)


이 대목에서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이라는 글을 본다.


이해 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가의 리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146~147쪽



철학 수입국에서 생산자로, 종속적인 삶에서 주체적인 삶으로 살아야 한다고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말한다. 책은, 중국·일본·한국 동아시아 3국에서 철학이 시작되는 풍경을 조망한다. 중국과 일본은 서구 침략과 근현대사의 변곡점에서 ‘철학’으로 나라를 다시 세웠다. 다만, 한국은 신채호 선생님의 곡처럼 철학을 수입만 하고 사유하지 않았으며, ‘주의의 조선’을 세우는 데 그쳤고, 그 한계를 지금까지 반복한다고 책은 말한다.

무엇으로 나라를 세우려는가? 철학이 있는가? 이 질문이 나라에만 필요하겠는가? 궁극에는 개인에게 이르러야 하겠다. 나라와 개인에게만 필요하겠는가?


책을 읽으며 월평빌라를 생각했다. 무엇으로 월평을 세우려는가? 

철학이 있는가? 

노말라이제이션의 월평인가 월평의 노말라이제이션인가, 

SRV의 월평인가 월평의 SRV인가, 

PCP의 월평인가 월평의 PCP인가, 

도전행동의 월평인가 월평의 도전행동인가, 

자연주의의 월평인가 월평의 자연주의인가? 


2008년 12월 12일 문을 열었다. 건물을 준공하고 외형을 갖춘 그해 8월부터 개원을 준비했다. 어떤 필요와 협의로 직원을 미리 뽑았다. 물론 입주자 수에 비례해서 순차적으로 채용했다. 오래 걸렸다. 채용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겼고, 미뤄지는 채용 일정에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해 가을, 대구에서 ‘사회사업 근본’ 야간 강좌가 열렸다. 4주 8회? 적지 않은 횟수였다. 12인승 승합차를 빌려 언제 채용될지도 모르는 예비 직원들을 데리고 1시간 거리의 그 강좌를 밤마다 오갔다. 가면서 예습 오면서 복습, 공부하기에 아주 좋았다.

문을 열었으나 입주자 30명이 한 번에 입주할 리 없다. 할 수도 없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달에 한두 명 입주했다. 대기 중인 직원들을 모아서 또 공부했다. 입주하지 않은 입주자를 상상하며 어떻게 지원할지 가상 시나리오를 쓰고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15년 동안, 우리는 매년 모든 직원(사회사업가는 물론 간호사·물리치료사·위생원·회계 담당자·영양사·조리원·국장·시설장 모두 포함)이 ‘사회사업 근본서’를 읽고 공부한다.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수입하는 데에 그치지 말고 생산자가 되라 했다. ‘공부 - 궁리- 실천 - 성찰 - 기록 - 공부 - 궁리 - 실천…’ 공식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생산자의 공식이며, 월평의 문화가 되었다.


월평은 다행히 ‘철학’으로 세워졌다. 의도했든 아니든, 다행히 근본으로 세워졌다. ‘사회사업 근본, 근본이 없으면…’ 말씀을 새긴다. 


2023년 12월 12일, 월평빌라 개원 15주년에 

 

중증장애인거주시설 월평빌라 https://cafe.daum.net/ilove392766

YouTube 월평빌라 www.youtube.com/@Wol-P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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