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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관점에서] 여성과 환경 그리고 모두를 위한 고민
  • 이연주 책임기자
  • 등록 2023-07-18 13:28:10
  • 수정 2023-07-18 13: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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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1학기 중 [여성복지론] 중간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여성과 환경 그리고 모두를 위한 고민

-‘에코페미니즘’을 읽고-

 

사회복지학부 사회복지거시전공 신준영(18학번)

  

Ⅰ. 서론

 

여성주의 관점에 대해 배우던 중 '생태주의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처음 듣게 되었다. 평소에 환경문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지만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조금 낯설었다. '여성과 환경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환경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파괴하는 것 아닌가?',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향상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등의 의문이 들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생태주의 페미니즘 관련 책을 찾게 되었다. 

여성환경연대의 책과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가 쓴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책이 있었다. 여성환경연대의 책이 우리나라의 상황과 더 잘 맞고 조금 더 읽기 쉬울 거란 생각도 했지만, 생태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자 '에코페미니즘'을 선택하였다. 본론에서는 각 장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중간중간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하여 내용을 전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는 전부 필자의 지식이 부족한 탓이다. 또한 필자의 생각이 조금은 적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대체로 동의하는 내용이 많고, 필자 또한 책을 읽으며 에코페미니즘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Ⅱ. 본론

 

1장은 서론으로, 마리아 미스와 반다나 시바가 책을 함께 쓴 이유에 관해 이야기한다. 반다나 시바는 개발도상국에 속한 인도에, 마리아 미스는 선진국인 독일에 살고 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둘 이지만,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에 각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지구상의 생명체를 위협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세계체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근대과학이 형성한 남성과 자연 간의 착취적인 지배관계가, 남성과 여성 간의 착취적·억압적 관계와 긴밀히 연관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통된 분석과 시각을 가지며, 해답을 찾기 위한 탐구는 서로에게로 이르게 했다고 한다. 둘의 목표는 북이 남을 지배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갈수록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원을 약탈하며 자연을 파괴하는 세계구조의 내재적 불평등의 문제를 여러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여성이 환경파괴에 대해 분노와 불안을 느끼고 환경파괴에 먼저 반대한다. 이러한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 세계 여성들은 유대를 맺을 수 있다. 

많은 여성이 지지하는 동등화 정책 즉, 남성들이 자연에서 취한 것에 대해 더 많은 혹은 동등한 몫을 요구하는 '남성 따라잡기'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도 있다. 환경오염과 파괴의 원인이 현대의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따라잡기를 통한 해방의 개념이 지구를 보호한다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자연의 제약 안에서 자유, 행복,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켜나가자고 주장한다.

우리 주위를 봤을 때 확실히 남성보다는 여성이 대체로 환경운동에 앞장선다는 느낌이 들어서 공감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남성 따라잡기'에 대한 비판의 부분이었다. 필자 또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적극적 차별, 직업·정치·교육에서의 여성할당제 같은 정책들 즉,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줄이기 위한 정책들을 무 비판적으로 바라봤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마냥 좋은 전략은 아니라고 한다.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접하게 되면서, 필자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1부 비판과 관점

 

1부가 시작되는 2장에서는 근대 환원주의 과학에 대해 비판한다. 환원주의는 복잡한 생태계를 단일 구성요소로 환원한다. 나아가 이것은 단일 구성요소의 착취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생태계를 조작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숲은 상업적인 목재로, 목재는 펄프와 제지업을 위한 섬유소로 환원된다. 그리하여 숲과 토지는 펄프의 생산을 증가시키도록 조작된다. 생산성만 증가시킨다면 숲을 파괴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합법화된다. 이는 기업이 사회적·환경적 비용이 극대화되는 현실에는 눈감은 채 이윤의 극대화라는 척도로만 효율성을 측정하게 한다. 상업적 이윤을 낳지 않는 특성은 무시되고 결국 파괴된다. 

이는 여성의 출산과 종자까지도 점차 확대된다. 출산의 의료화는 여성의 신체를 전문가들이 관리할 수 있는 일련의 파편적이고 대체가능한 부품으로 기계화한 것과 관련된다. 임신한 여성은 이제 인간의 재생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아기라는 생산품을 꺼내야 하는 '원료'로 간주된다. 새로운 재생산기술은 어머니에게서 의사로, 여성에게서 남성으로의 권력 이동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자연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가정과 기업이윤을 위해 종자는 유전적으로 조작되고 특허권이 설정되어 소유가 가능한 자원이 되었다. 완전한 자기재생적 산물이었던 종자가 스스로 번식하지 못하는 상품생산을 위한 단순 원료로 전락했다. 기업은 이윤을 얻고 농민은 피해를 보게 된다.

출산의 의료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재생산의 측면에서 여성과 종자가 연관이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생명과 관련된 가치마저 환원하여 이윤을 뽑아내려 하는 것에서(꼭 그렇다고만은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환경이 파괴되고 누군가는 희생될 수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3장에서도 과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이 이어진다. 여성·자연·이민족에 대한 식민화, 착취가 없었다면 그 유명한 서구문명도, 진보의 패러다임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학과 기술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근대 자연과학의 아버지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마녀사냥을 당하던 여성에게 했던 것과 유사하게) 비밀을 얻어내기 위해 자연을 종속시키고 억압하고 고문까지 하도록 요구하였다. 베이컨 이후 과학적 방법론이 근거하는 인신론적 원칙은 폭력과 권력이다. 어머니 자연이라 불리는 유기적 전체를 폭력적으로 파괴하지 않고는, 연구대상을 공생적 맥락에서 강제로 분리하여 실험실에 격리하지 않고는, 물질의 신비를 밝혀내거나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기 위해 연구대상을 조각내어 분석하지 않고서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지식을 얻을 길은 없다.

또한 가치에서 자유롭고 사심없는 순수한 과학, 진리의 무한한 추구에만 열중하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기초연구는 누군가 돈을 대지 않는다면 연구를 할 수 없고 자금의 배후에는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가 담겨있다.

태아연구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에서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저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의 문제이고 권력은 남성에게 있다고 한다. 예로 나치수용소에 갖힌 사람들 특히 정신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과학자들이 그들을 비인간이거나 인간 이하라는 정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때 행해졌던 인체실험이 떠올랐다. 그 당시 과학자들은 나름대로 정의를 받아들여 죄책감을 덜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신 개발이나 암 치료를 위해 동물실험이 행해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과학의 추구에 대해서도 사실 그렇지 않다는 주장에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정말로 지구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실험하고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2부 자급 대 개발

 

4장은 '따라잡기식 개발'에 관한 내용이다. '따라잡기식 개발'은 유럽·미국·일본이 취한 바와 똑같은 산업화와 기술진보와 자본축적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같은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산업국과 저개발국은 식민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산업국들의 지속적인 성장에 드는 경제·사회·환경 비용이 식민화된 남의 국가들로, 그 나라의 환경과 주민에게로 옮겨간다. 공식적인 식민통치가 끝난 후에도 이러한 지배관계를 유지해야만 산업국의 노동자들이 남의 노동자들보다 10배 이상 많은 보수를 받을 수가 있다.

이와 유사한 식민관계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한다. 이것의 관계란 평등한 것이 아니라 위계적이며 착취·억압·지배라는 특징을 갖는다. 여성은 가정주부로 규정되어 그들의 노동은 GNP 계산에서 빠진다. 따라서 여성은 이 체제의 내부 식민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북에서조차 과학과 기술, 상품과 용역, 자본과 GNP의 무제한적 성장의 패러다임은 점점 더해가는 환경악화와 그에 따른 삶의 질의 저하 문제를 일으킨다. 이는 빈민층과 여성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소비를 자제하고 생산패턴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과학과 기술이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주기를 기대한다.

초기 여성운동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 '따라잡기' 전략을 해방의 지름길로 받아들였다. 여성의 평등권 정책을 통하여 가부장적인 남녀관계가 철폐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남성, 특히 영향력있는 지위의 백인남성이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제시된다는 점을 비판한다. 따라서 세계 모든 여성에게 확대될 수가 없다. 예로 제3세계 여성 노동자에게 산업국들과 동등한 수준의 임금을 준다면 북의 여성 노동자들은 그 물건을 거의 살 수 없게 된다. 세계시장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이들 두 부류 여성들의 이해관계는 적대적이다. 따라서 물질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접근을 포기해야만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로 한 여성이 환경오염으로 인해 독일에서 3개월 이상 모유를 먹이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여 해결책으로 인도 남부에서 안전하고 건강에 좋은 유아식을 생산하자는 계획을 제시했다. 그렇게 하면 독일 여성의 문제도 해결되고 가난한 인도 남부에서도 새로운 수입원을 얻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빈민층의 주식을 세계시장에 내놓아 수출품으로 만든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사 먹지 못하게 된다. 가격이 급등하고,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해 살충제 등의 농약이 사용될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독일 여성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나머지 그녀는 인도 남부 빈민 여성들의 이익을 기꺼이 희생하려 하는 것이다.

필자도 이 이야기의 독일 여성처럼 생각해왔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름 선진국에 살면서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진다. 또한 여성의 남성 따라잡기 전략이 왜 문제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는데, 다만 필자는 남성이기에 여성 평등권 정책을 다른 국가의 여성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조금 애매한 것 같다. 이번 장에 필자의 기존 생각에 변화를 주는 이야기가 많아서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과학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아직 갖고 있다. 저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 것 같아서 뜨끔하지만, 과거에 그랬다고 미래에 꼭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으니까.

 

5장에서 인상깊었던 내용은 가난을 보는 관점과 지표에 관한 것이다. 개발이데올로기는, 자급자족을 통해 기본욕구를 충족시킴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위해 생산되고 시장을 통해 분배되는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문화적으로 파악된 가난이 반드시 물질적으로 낮은 질의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직접 기른 작물은 가공식품보다 영양이 풍부하며, 콘트리트보다는 지역 특유의 자재로 지은 집들이 그곳의 환경에 더 잘 맞는다. 자급적 생계를 가난으로 보는 문화적 인식은 개발과정을 '빈곤퇴치' 계획으로 정당해왔다. 문화적으로 편파적인 과정으로서 '개발'은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생활양식을 파괴하며, 자원을 다양하게 이용하는 생존 수단을 부정하고 자원 집약적 상품생산으로 대체함으로써 실제적인 물질적 빈곤을 낳았다. 여성의 생존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이 자연 자원의 부족은 여성과 모든 주변화된 민족들을 전례없는 지경으로 빈곤화하고 있다. 

GNP(국민 총생산)로 측정되는 소득과 현금의 흐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여성·어린이·환경을 둘러싼 생명의 연결망이 주된 관심 대상에서 배제됨을 뜻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자연·여성·어린이의 공헌은 부정되고 무시되고, 이들에 미치는 경제 개발과 성장의 부정적인 영향은 대체로 인정되지 않거나 기록되지 않는다. 여성과 어린의 지위와 환경의 상태가 개발의 '지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순수한 소득지표는 종종 미래세대의 운명을 짓누르는 삶의 빈곤을 포착하지 못하며, '풍요'가 특징인 조건에서도 환경재난에서 비롯되는 생존의 위협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빈곤이란 서구 산업사회라는 범주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생활양식으로서만 규정되었다. 우리는 이 제한되고 편견에 사로잡힌 인식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건강한 삶의 위협이라는 견지에서 빈곤이라는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

물론 절대적인 빈곤이 심각한 국가도 있겠지만, 산업국처럼 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가난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개발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도 포함한 새로운 경제 지표가 있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빈곤을 소득으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 기본욕구 충족 등 비록 주관적이긴 하지만 이 요소들도 포함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다만 구체적인 방법에 관한 내용은 없어서 아쉬웠다.

 

6장에서는 저자가 체르노빌 사고로부터 얻은 교훈을 소개한다. ① 남성이 지구에 저지른 일은 결국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될 것이다. ② 사고에 '책임있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③ 과학은 객관적이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고 윤리적인 원칙에 근거한 것이 아닌 돈이 된다는 이유로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④ 권력층이 대중과 대중의 공포를 두려워하지만, 지구 위의 생명이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

환경이 계속 오염된다면 결국 모두가 피해를 본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나 필자는 원자력발전소를 반대하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를 하자면 비행기는 자동차보다 확률적으로 훨씬 안전한데, 그럼에도 비행기를 위험하게 인식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원자력발전소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당장은 다 없애기란 힘들 것이다. 그 부분을 석탄, 또는 가스, 신재생에너지로 메워야 하는데 더 환경파괴가 될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를 줄이기 위한 대안을 먼저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

 

3부 뿌리를 찾아서

 

7장은 신성한 어머니 땅에 관한 내용이다. 원래 땅이란 지도상의 공간이나 영토 단위를 뜻하지 않았다.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영토로서 공간은 식민화의 수단으로 생겨났다. 부족사회나 농경사회에서는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이 모두 땅으로부터 나오며, 땅은 단순한 '생산요소'가 아닌 사회의 영혼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땅을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자궁이라고 표현한다. 처음에는 식민주의를 통해, 그다음에는 개발을 통해 백인남성의 문화가 들어왔다. 그들은 땅을 그저 정복하고 소유하는 영토로 여긴다. 개발은 신성한 어머니였던 땅을 처분가능한 대상, 즉 광물을 위해 파헤쳐도 좋고, 거대한 저수지 아래 수장해도 되는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저자는 두 계급의 실향민들이 이 '지구촌'에 생겨나는 듯하다고 한다. 한 집단은 전세계적 규모로 옮겨다니지만 이 세계는 그들에게 재산일 뿐 어디에도 고국은 없다. 문화적으로 뿌리 깊은 부족민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에서 뿌리뽑힘으로써 물리적으로 실향민이 된다.

필자는 어렸을 때 산과 계곡이 있는 시골에서 자랐다.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가끔 이웃의 농사일도 도우며 자연이 주는 기쁨을 만끽했던 것 같다. 지금 건물로 가득 찬 도시에 있으면서 조금은 갑갑함을 느낀다. 나에게 추억을 주었던 어렸을 적 그곳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다. 어른이 되어 땅을 그저 개발할 수 있는 곳, 재산으로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10장의 제목은 '백인남성의 딜레마: 자기가 파괴한 것에 대한 추구'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논리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던 장이다.

도시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진보와 근대성의 정점이라 보는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연', '황야', 남의 '저개발'국 등 자신들이 '침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지역에서 여가시간을 보내려 한다. 저자는 그들이 '처녀'지에 '뚫고 들어가' 그것을 오늘날 관광과 화폐경제를 의미하는 백인 문명에 개방시키고 싶어한다고 표현한다. 도시에서는 풍요의 와중에서 깊은 불안감, 슈퍼마켓 선반에 상품들이 더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절망은 깊어지며, 부재해 있지만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야생의 자연과 땅을 상품으로 소비하고 다른 상품을 소비할 때처럼 쓰레기더미만을 남긴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비주의 관광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 열망의 결과는 자신들이 동경하는 것을 파괴하기이다.

계몽주의시대, 18세기 말까지 계속된 여성에 대한 폭력의 향연(마녀사냥) 이후, 18세기 문학과 예술에는 '여성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동경, 여성을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것과 일치시키는 새로운 동경이 등장한다. 진정으로 생기있고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 육체적으로 파괴되고 제거된 후에야 새로운 부르주아계급의 남성들은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낭만적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듯하다. 이 이상에서는 약하고 순종적이고 감상적인 여성, '부양자이자 보호자'인 남성에게 의지하는 여성이 주역을 맡는다. 이 이상적 여성상은 자본축적을 위해 세계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한 강하고 진취적인 부르주아 백인남성들에게 꼭 필요한 보조품이었다.

오늘날 폭력과 욕망, 동경과 환상 간의 관련성을 잘 보여주는 예는 포르노그래피와 매춘관광이라고 한다. 포르노그래피는 조각조각 나뉜 여성 육체의 선택된 일부를 보여준다. 이들 이미지는 이 육체와 남성의 관계를 특징짓는 폭력을 반영한다. 매춘관광은 '이국적'이고 유색인인 식민지 여성에 대한 욕망이다. 이 관계는 애정어린 것이 아니라 구매력을 바탕으로 한 소비주의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백인 남성들이 매춘관광에 끌리는 이유는 대체로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남녀 간의 주종관계와 권력 때문이다.

산업사회의 평균적인 남성은 거의 일생동안 식물, 대지, 동물, 자연력과 직접적인 신체접촉을 가질 기회가 거의 없다. 현대 남성들이 자신과 자연 사이에 기계를 많이 끼워넣을수록 자연과 여성을 더 조각내는 것이며, 전체에서 절단된 일부에 욕망을 투사할수록 원래의 완전하고 길들지 않은 자유로운 여성과 자연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 파괴할수록 갈망은 더 커지는 것이다. 

오늘날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은 설사 불임증이 있다 해도 생명공학에 힘입어 그 욕구를 만족시키려 한다. 여성에게 이 열망은 그들의 육체와 생식잠재력에 내재한다. 재생산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욕망이 외부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충족된다. 재생산기술은 남녀 모두를 자신의 몸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본성과 정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친밀한 과정,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경험하길 원하는 과정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체외수정 프로그램에 등록한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임신기간은 독일에서 말하듯 '좋은 희망'의 시간이 아니라 불안과 희망, 두려움과 실망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저자는 이러한 욕망들의 추구의 핵심이 유년기에 대한 향수 즉 자유와 모험에 대한 추구라고 한다. 인간의 근본적 호기심이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적 발명으로는 충족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풍요와 여가와 오락산업에도 불구하고 산업사회는 깊은 권태와 무감각으로 가득하다. 현대의 생활양식은 사람들이 창조력을 발휘하고 노동할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미리 계획되고 조직되어 있어 더 이상 모험이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허용된 모험이 바로 쇼핑이다. 그러나 분명 이 모험, 새로운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즐거움은 곧 싫증난다. 새로운 물건을 손에 넣는 이 모험을 계속 경험하길 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쇼핑광이 된다. 그것은 현대도시의 생활양식에 내재된 창조성의 결핍과 불모성을 보상하려는 무익한 시도이다.

산업국에서 상품과 돈의 풍요는 타자들(자연, 제3세계 등)의 빈곤화만이 아니라, 심리적 의미에서는 물론이고 물질적 의미에서조차 달랠 길이 없는 욕구를 더욱 증가시켰을 따름이다. 오늘날 번쩍거리는 도심에는 삶의 질, 깨끗한 공기, 고요함, 깨끗한 물, 건강한 음식이 결여되어 있다. 무엇보다 도시 생활에는 인간적인 온기가 없고, 인간공동체와 자연세계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없다. 그러나 산업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근대성의 기획 및 상품생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과 이민족에 대한 착취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다.

마녀사냥에 대해 그저 여성에 대한 억압으로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관점을 알게 되었다. 또한 도시에 살면서 느끼게 되는 소외감과 행복하지 않음, 자연에 대한 동경, 그리고 무한한 소비를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 등 지금의 현상과 그에 대한 원인을 정말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4부 에코페미니즘 대 생명공학을 통한 새로운 투자영역

 

11장에서는 여성의 노동과 지식의 원리인 다양성에 관하여 설명한다.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생산의 범위' 밖에 있다는 이유로 여성 노동을 '생산'으로 계산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누락은 노동하는 여성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노동을 너무나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여성들이 가족과 공동체를 부양하기 위해 일하지만, 그들이 하는 노동의 대부분이 '임금'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노동이 가부장적 계산법에서 평가절하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가사노동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다. 그런 부분에서 필자는 남성 또한 가사노동을 같이 해야 하고, 가사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여성들은 생물다양성의 관리자였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생물다양성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소비하며, 보존해왔다. 다양성에 근거한 생산체계는 생산성이 낮은 체계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다. 이는 일차원적인 수확량과 산출량만을 근거로 보았기에 그런 것이다. 여성들의 노동과 지식은 '분야들' 사이의 '중간'영역, 분야 간의 보이지 않는 생태적 흐름에서 주로 발견되며, 바로 이런 연결고리를 통해 자원이 부족한 조건에서도 생태적 안정성, 지속가능성, 생산성이 유지된다. 여성은 생물다양성을 통해 생산을 하지만, 기업체의 과학자들은 단일성을 통해 생산을 한다. 여성 농민들에게는 생물다양성이 내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종자의 핵심은 생명의 지속이다. 국제적 종자회사나 영농기업에게는 생명공학 산업을 위한 '원료'로서만 가치있을 뿐이고 종자의 가치는 생명의 단절에 있다. 특허와 생명공학은 이중의 절도 행위이다. 그것은 제3세계의 생산자에게는 생물다양성을 훔치고, 세계 곳곳의 소비자에게는 안전하고 건강한 음식을 훔쳐간다.

생물다양성에 여성이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기업들은 반대로 이윤을 위에 번식하지 못하는 종자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팔고 생물다양성을 파괴한다. 지구에 미칠 악영향이 걱정된다.

12장에서 재생산기술과 관련하여 인상 깊었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새로운 재생산기술은 전체적인 품질관리일 뿐만 아니라 대다수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와 출산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만들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이 의사에게 계속 검진받지 않은 채 아기를 낳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병원에서 태어난다. 여성의 선택을 넓혀준다고 선전되는 새로운 재생산기술은 여성의 공포를 크게 증폭할 것이다. 여성은 결국 완전히 수동화 되어 여성 자신과 그 아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의료전문가들에게 스스로를 전적으로 내맡기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여성해방은 임신을 조절하는 여성의 통제력과 동일시되어왔다. 다양한 피임방법, 특히 피임약의 개발은 많은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임신에서 여성을 해방시켜줄 결정적인 기술혁신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임신을 질병으로, 순수한 생물적인 사건으로 봄으로써, 여성들은 자신들의 생식능력에 대한 책임을 의료전문가와 과학자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성적 관계를 바꾸는 대신 기술혁신과 의학적인 처방에 여성해방의 희망을 걸게 된 것이다.

서구에서 페미니스트단체들이 유포하는 여성의 '재생산권'과 같은 개념이 인구조절정책의 통제를 받는 방글라데시의 대다수 여성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늘날 대다수 서구인의 태도는 히틀러의 우생법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우생학자들이 취했던 태도와 똑같다. 그들은 강요를 싫어하지만 '그' 사람들의 '무분별한 번식'을 막을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최종해결책을 강요하는 추세는 특히 여성을 겨냥한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가장 곤궁한 여성들에게 책정된 식량 구호품이 그들을 협박하는 수단이 되어, 몇 킬로그램의 밀을 대가로 불임수술을 받게 만든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드러낸다.

 

5부 무역의 자유냐 생존의 자유냐

 

14장에서는 여성운동에서의 ‘자기결정’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인 생각이 나타난다. 자기결정 곧 우리의 신체와 삶에 대한 자율성의 요구는 여성운동의 근본요구 중 하나이다. 저자는 씨몬느 드 보부아르가 남성의 자기결정이 여성과 자연의 종속과 타인 결정에 근거한다는 점을 상당히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또 다른 타자를 종속시키는 것을 뜻하는 똑같은 논리를 통해 여성의 자기결정에 다다르고자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여성의 타자인가? 결국 여성의 몸, 특히 그것의 '길들지 않은' 생식력이 적으로 간주된다.

공생관계 곧 살아있는 관계가 기술적으로 해부되는 순간 나뉜 부분들은 서로 적대관계에 놓인다.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싸우며 주체-객체 관계가 성립된다. 태아가 아직 자기결정을 내릴 수 없으므로 최고의 사회적 주체인 국가가 어머니와의 투쟁과정에 개입한다. 자기결정에 대한 모든 요구는 국가를 향해 제기되며 국가는 더 자유로운 법을 제공하거나 제한 규정을 철폐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이 알려고 들지 않는 것은 우리가 국가에게 모든 생식 과정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주어야만 국가가 이를 행할 것이라는 점이며, 이처럼 점점 강화되는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술이라는 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자기결정'이라는 이름 아래 기술적 가부장제가 우리의 살아 있는 관계, 공생관계들을 더 이상 해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분들 간에 적대를 만들고 그 부분들을 상품으로 팔고 이용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기술적인 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가 주장하는 ‘살아있는 관계의 재창조’란 첨단 의사들이 더 이상 우리의 신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거부해야 하고 다른 인간들, 여성과 남성과 어린이가 임산부 혹은 불임여성과 살아 있는 사회적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세대 간의, 무엇보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가부장적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리란 것을 의미한다. 한 여성이 자신이 임신했거나 혹은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필요로 하는 도움, 지식 그리고 또한 없어서는 안될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도움을 주는 환경, 무엇보다 엄마 세대와의 애정어린 살아 있는 관계가 없다면 개별 여성들이 첨단 의사나 국가와 맞설 방법이란 없다.

남성들도 성관계의 결과를 비롯해 생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저자에게 여성해방이란 육신성에서 분리되어 초월이라는 남성의 영역으로 '상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들이 이 살아 있는 관계와, 이 일상성과, 이 부담과, 이 내재성과 연결됨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욕망과 부담이 평등하게 공유되는 새로운 양성관계가 필요하다. 이제 남녀 모두 자연이 우리의 적이 아니고, 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적이 아니며, 우리의 어머니도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는 것을 내용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만약 필자가 씨몬느 드 보부아르의 책을 읽었다면 그에 따라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만의 기준과 관점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하지만 아직 필자는 그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어쨌든 저자가 주장한 ‘살아있는 관계의 재창조’라는 것에 동의한다. 남성과 여성, 자연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에코페미니즘의 이런 부분이 필자는 마음에 들었다.

 

15장은 자유무역과 지적재산권에 관한 내용이다. 기업들을 위한 '자유무역'은 제3세계 정부와 국민의 자유와 자율성의 부정에 기초한다. 미국은 자국 농산물의 수출을 보조하기 위해 약 100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리하여 쌀 100파운드당 세계시장 가격을 8달러에서 4달러도 못되게 낮추었다. 이는 비용효율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100파운드당 17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 결과 제3세계 농민들은 싼 수입농산품 때문에 지역 주산물의 가격이 낮아져 벌이가 좋지 않게 돼 농사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인 영향은 제3세계 여성에게 더 크게 작용하는데, 그 사실이 간과되거나 무시 되지만 식량 생산과 가공에서 주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식량에 대한 통제권은 점점 여성들의 손을 떠나 북의 초국적기업에게 넘어간다. 

지적재산권은 농촌 여성들로부터 힘과 통제권과 지식을 앗아가는 또 하나의 도구로 쓰인다.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와 그 밖의 국제규약들에서 지적재산권은 농촌 여성이 관리·보호하던 종자를 빼앗아 초국적 기업의 사적 소유물로 만들고자 한다. 대부분의 식물다양성이 제3세계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산업국들의 통제 아래 있는 종자와 식물원료들은 농민들에게서 무상으로 빼앗은 것인데 이를 특허물질로 만들어 그들에게 되판다는 것은 지극히 모순된 일이다. 그 결과 종자회사들은 독점이윤을 얻게 되었고 재능있는 제3세계 농민들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자신들의 종자를 비축하고 사용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미국이 농산물 가격을 저렇게 조정하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나라 농민들도 분명 피해를 봤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착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해야 굴러간다니 마음이 좋지 않다.

 

6부 자급: 자유 대 해방

 

17장에서는 해결책들에 관한 내용이다. 소비주의 모델의 극복은 부유한 산업국들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부유한 나라 계급들이 생활 수준을 자발적으로 낮추고 소비패턴을 바꾸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들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리라는 확신이 없는 한 인기 없는 정책을 도입하기를 꺼린다. 그러므로 소비자해방운동은 소비자 자신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러한 운동이 강력해지고 널리 퍼졌을 때에야 비로소 정치가와 기업가들이 그것을 따를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사람들이 '좋은 삶'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전과는 다른 가치들, 즉 자급자족, 타인 및 자연과의 경쟁 아닌 협동,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그 다양성에 대한 존중, 노동과 삶에서의 만족과 기쁨 찾기 등을 강조한다. 소비자해방의 목표는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것이다. 

소비자해방과 변화된 생활양식이란, 인간과 환경의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막고, 기존의 가부장적 남녀관계를 심화시키지 않으며, 미래세대들의 생활조건을 위협하지도 않는, 그리고 의존성을 높이는 대신 자립을 고취하는 다른 충족기제들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부자나라에서 생활양식의 변화가 대규모로 일어난다면 환경파괴와 제3세계의 착취를 멈출 수 있을 뿐 아니라, 북의 중산층이 자기네 나라의 하층계급과 남의 주민들에게 제시한 소비모델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경제단위에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 자립, 여성과 어린이의 욕구를 우선시할 수 없다. 소규모 경제단위는 공동체 내의 협동을 용이하게 하며, 자립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고, 상부상조와 호혜성 같은 덕목이 작용하도록 만들 것이다. 현행 성별분업도 변화되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 넓은 의미의 생명의 생산과 유지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19장은 인구 증가와 환경에 관한 내용이다. 남의 국가들에서 인구 증가는 점차 전지구적 규모의 환경파괴를 야기한 주된 원인으로 보여지고 있다. 진짜 위협은 늘어나는 세계인구가 북의 평균적인 생활양식을 흉내내어 그만큼 많은 자동차와 텔레비전, 냉장고 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활양식의 일반화가 자연에 치명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자동차 수'는 늘어나야 하지만 이로 인한 환경피해를 줄이기 위해 남의 인구(차를 사지 않을 사람들)는 줄어야 한다. 이것이 산업체제의 진정한 딜레마이다. 성장의 포기를 원치 않으므로 성장이 끼치는 해악을 그 희생자, 즉 남의 가난한 사람들, 특히 아이를 너무 많이 낳는 여성들에게 뒤집어씌운다.

인구 증가는 환경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한 양상이며, 인구 증가와 환경위기 모두 처음에는 식민주의, 다음에는 북이 강요한 악개발 모델에 의한 자원박탈과 생계파탄과 관련된다. 환경파괴의 원인으로 인구를 집중 지목한 것은 두가지 차원에서 잘못되었다. ① 이것은 희생자, 주로 여성들을 비난한다. ② 현재의 정책처방은 경제적인 불안정을 다루지 못하고 생존권을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문제를 회피한다. 그릇된 이해는 그릇된 해결책을 낳는다. 그 결과 수십억의 돈을 인구조절 프로그램에 투자했지만 환경파괴, 빈곤, 인구 증가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의 근원, 즉 가난을 낳는 착취적 세계시장체제를 직접 다루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원을 이용할 권리와 자유를 줌으로써 그들이 지속가능한 생계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환경파괴와 그에 수반되는 인구 증가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남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점점 더 효과적인 기술적 처방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긍지와 본래의 온전함, 그들과 자녀들의 건강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호르몬 피임약을 사용하는 서구 여성들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영양상태도 양호하며 사후검진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태에서 이런 선택을 한다. 그러나 인도나 방글라데시의 평균적인 여성들은 이 모든 편의들을 제공받지 못한다. 인구조절 프로그램이 다국적 제약회사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고안된 것이고, 그리하여 방글라데시 국민들에게 원조와 차관의 조건으로 강요되었으며, 이 프로그램이 점점 더 강압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시행에 책임이 있는 정부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건강상의 문제를 다룰 어떤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볼 때 여성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에코페미니즘은 생식을 고립된 것으로 보지 않고 남녀관계, 성별분업, 성관계, 그리고 정치·사회·경제 전반의 상황과 연관된 문제로서 조망한다. 현재는 이 모든 것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하에 있다. 그러므로 최우선 과제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과 생식능력에 대한 자율성을 더 많이 회복하는 일이다. 이는 먼저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신체와 하나가 되는 법을 다시금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재생산의 새로운 생태학이란 수태 지식을 되찾고, 현대적 수단뿐 아니라 전통적 수단도 그들에게 방법을 일러줄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남성들도 여성의 수태 지식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가부장적 지배와 착취로부터 성관계를 해방시키는 것은 단순히 피임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생활양식, 제도, 남성과 여성의 일상적 행동까지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남성과 여성이 성적 행위를 자연과 그들 자신과 상대방과의 애정어린 극진한 상호작용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여성에게 해를 주지 않는 산아제한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애정어린 극진한 관계는 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자신과 서로와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지구와 지구에 사는 모든 것과 관계맺는 인간능력으로서의 성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

필자 또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계속 증가하는 인구로 인하여 환경이 더욱 파괴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시각으로 제3세계 여성들이 피임을 강요받고 건강은 무시되는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현재의 소비생활을 반성해야 할 것 같다. 남녀갈등이 어느 정도 심한 지금 저자가 주장한 남성과 여성의 애정어린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지구에 사는 모든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에도 매우 공감한다.


7부 결론

 

끝으로 20장에서는 자급적 관점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에코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자급적 관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경제활동의 목표는 상품과 화폐를 점점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 혹은 재창조이다. 즉 상품구입이 아니라 사용가치의 생산에 의해 주로 이루어 지는 기본적 인간욕구의 충족이다. 자급자족, 지역성, 국가관료주의로부터의 탈중앙집중화가 주된 경제원칙이다.

② 이러한 경제활동은 새로운 관계에 근거를 둔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은 존중과 협력과 상호성을 바탕으로 한다. 자연과의 새로운 비착취적 관계는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의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③ 참여민주주의 혹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토대를 두며 또한 그것을 고무한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④ 다면적인 혹은 시너지효과를 낳는 문제해결방식을 요구한다. 사회문제들은 환경문제와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

⑤ 과학·기술·지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⑥ 문화와 노동의 재결합, 부담으로서 노동과 즐거움으로서 노동의 재결합을 이끌어낸다. 주된 목표는 행복과 충만한 삶이다.

⑦ 물이나 공기, 쓰레기, 토양, 자원 등의 공유재산을 사유화 혹은 상업화 하는 데 반대한다.

⑧ 남성들이 지구의 생명을 창조하고 보존할 책임을 실제로 분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그들은 축적을 위한 파괴적인 상품생산에서 손을 떼고 생명보존을 위한 여성의 노동을 나누어 해야 한다. 

 

Ⅲ. 결론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는 시리얼이 있다. 주원료인 옥수수는 인도산이다. 이것 또한 누군가를 착취하여 만들어졌을까. 주위의 물건을 보면 원료가 우리나라인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이렇게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제3세계 국가를 착취해서 얻어진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처음의 질문, 즉 여성과 환경과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곧 여성을 위하는 것이고, 여성을 위하는 것이 곧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다. 환경과 여성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필자는 마음에 들었다.

에코페미니즘 관점에서 필자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제품을 구매하고, 최대한 소비를 줄이는 것 정도가 떠올랐다. 작지만 꾸준히 실천해야겠다. 또한 앞으로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도 이 책을 떠올리며 어떤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것은 나의 인생 경험에 있어서 소중한 것이 되었다. 흥미로운 내용도 많았고, 새로운 지식도 많이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기존 생각의 틀을 많이 깨주었다. 신선한 충격을 많이 받았다. 끝으로 자신만의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저자의 뛰어난 내용을 잘 정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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